헤르타 BSC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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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연고로 한 스포츠 클럽. 이 항목의 거의 대부분의 내용은 분데스리가의 축구 클럽을 서술하고 있으나, 사실 풋살, 여자축구, 비치발리볼 팀까지 있는 지역 스포츠 클럽이다. 터키의 갈라타사라이 SK같은 느낌이라고 하면 이해하기 쉽다.
팀의 공식 명칭은 헤르타 베를린 스포츠 클럽이다. 그래서 약칭으로 헤르타라고 하며, 또는 헤르타 베를린, 스포츠 클럽까지 줄여서 헤르타 BSC로 표기한다. 헤르타는 독일 신화에서 풍요의 여신인 네르수스의 별칭이라고 한다. 수도 베를린의 많은 클럽 중에서 제일 강하고,[8] 또 그렇기 때문에 베를린에서 제일 인기도 많은 편인데, 이 팀의 역사는 진짜 파란만장하기 그지 없다. 하지만,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이탈리아의 AS 로마와 SS 라치오, 잉글랜드의 첼시 FC나 아스날 FC 및 토트넘 홋스퍼 FC를 비롯한 런던 팀들, 프랑스의 파리 생제르맹 FC 등 수도를 연고지로 둔 다른 클럽의 위상, 전력과 비교하면 유독 초라한 편이다. 심지어 분데스리가보다 한 단계 아래 리그의 수도권 팀인 SL 벤피카, AFC 아약스, 디나모 키예프 같은 팀들보다도 위상이 떨어진다. 사실 독일은 수도권인 베를린은 그냥 대도시일 뿐이지 경제적인 위치나 영향력은 독일의 다른 도시인 함부르크, 뮌헨,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등에 비하면 일천한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베를린은 예전엔 동독 한가운데에 떵그러이 놓여있던 곳이기도 해서 한계가 있는 점도 있다.
1936 베를린 올림픽 주경기장인 베를린 올림피아슈타디온을 그대로 홈 구장으로 쓰고 있어서 관중석 규모를 봐도 장난이 아니다. 분데스리가에서도 헤르타 베를린보다 더 많은 관중석을 가진 구단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하나 뿐이다.
2. 역사
1892년 BFC 헤르타 92라는 이름으로 팀이 창단되었다. 1920년대초 재정적 위기로 인해 베를린의 다른 클럽인 베를린 SC와 잠시 합병하며 팀명을 현재의 이름인 헤르타 BSC로 바꾸었다. 합병하며 재정적 위기가 해소되자 20년대말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지역 리그 챔피언들이 모여 벌이는 독일 전국 챔피언십 결승전에 1926년부터 6년 연속 진출한 것이다. 그러나 내리 4년을 준우승하다가 1930년에 첫 우승하면서 비로소 콩라인에서 탈출했다. 이 우승으로 재정적으로 여유가 생기자 다시 베를린 SC와 분리되고 포상금을 지불한뒤 다음시즌인 1931년 다시 한번 우승을 거둔다. 하지만 이 기세를 이어갈 찰나에 나치가 나오고, 제2차 세계대전이 터져버렸고 당연히 나치는 졌고, 베를린은 서구와 소련에 의해 두 동강이 나면서 이 팀의 안습한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래도 베를린의 대표 클럽이라서 1963년 분데스리가 출범 당시 원년 멤버로 낄 수 있었다. 문제는 1965년 정해진 급료 체계[9] 를 넘어서 선수들에게 급료를 준 사실이 드러나 강제로 강등된 것. 다만, 이건 헤르타 입장에서 정말 억울한데, 이는 동독 한 복판에 낀 서베를린으로 아무도 오려고 하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임금을 높게 지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71년 분데스리가 승부조작 사건에 가담한 것은 두고두고 까일 일. 다만, 그들이 주범은 아니라서 큰 처벌은 받지 않았다.
이 때의 강등을 딛고 바로 승격해서 1970년대에는 준우승도 한 차례 기록하는 등, 제법 괜찮은 성적을 냈다. 그러나 서베를린에 고립된 클럽이라는 지역적인 한계는 계속 팀의 운영에 악영향을 미쳤다. 고립된 섬으로 선수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더 많은 급료 지출이 필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영진은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돈을 계획적으로 쓰기보다 더 함부러 쓰는 등, 경영이 완전히 막장이었고, 급기야 부실 경영으로 인해 팀이 흔들리면서 강등, 1980년대와 1990년대까지 17년을 하부리그에서 보내는 수모를 경험한다.
팀 경영진이 얼마나 막장인지 알려주는 한 일화가 있다. 동서 분단 당시 동베를린의 헤르타 팬들의 비밀 모임이 있었다. 헤르타 구단 측도 이를 알고 있었는데, '''문제는 이를 구단 홍보 문구에 그대로 삽입한 것.''' 당연히 동독의 비밀경찰 슈타지가 이를 알아챘고, 결국 동베를린의 헤르타 팬들은 그대로 코렁탕 크리... 동네에서 나온 1980년대 독일 최고의 테크니션인 피에르 리트바르스키는 그냥 가만히 넋놓고 있다가 FC 쾰른에 뺐겼다.
다행히도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로는 이런 급료 체계의 필연적인 한계를 넘어서 도약할 수 있었고, 동베를린 지역의 팬들까지 흡수하면서 베를린에서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팀으로 도약했으며 그동안 2.분데스리가에서 머물던 팀은 1996년에 부임한 위르겐 뢰버 감독의 지휘 하에 1996/97 시즌에 3위로 1부에 승격했다.. 하지만 이미 부실화된 경영으로는 뭘 해 볼 도리가 없어서 1998/99 시즌에 한번 챔스에 나간 것을 빼고는 대체로 중위권 정도를 전전했다.
3. 최근 성적
2008-09 시즌에는 보로닌 등 임대 선수들의 맹활약으로 후반기 한때 선두를 차지하고 4위까지 차지하지만, 그들이 원 소속팀으로 돌아간 이후에는 바로 리그 최하위로 강등당했다. 그래서 2010-2011 시즌에는 2부리그에서 뛰었다. 3월까지 선두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다시 승격할 것으로 여겨졌고, 결국 32라운드에서 승격을 확정지었다.
3.1. 2011-12 시즌
1년만의 분데스리가 복귀. 초반에는 도르트문트 원정에서 2:1로 이기는 대이변도 연출했지만(2011/12시즌 우승팀 도르트문트의 유일한 홈경기 패배) 2011-12 시즌 26라운드까지 6승 8무 13패,승점 26점. 17위, 또 강등 위기에 빠져있다. 그나마 13위와 승점 차가 2점 밖에 나지 않아서 아직 승격 희망이 있다. 하지만 이후로 승점이 벌어지면서 15위 아우크스부르크와 5점차로 벌어졌다. 그나마 31차전 레버쿠젠 원정에서 3:3으로 겨우 비기는 선전을 벌였으나 이후로 2경기를 다 지면서 17위로 내려갔다. 이젠 2부리그 3위와 플레이오프를 벌이는 순위 16위인 1.FC 쾰른과 1점차라서 16위나마 희망에 걸어야 할 판국이다.
2012년 들어 전 그리스 국가대표팀을 맡으며 유로 2004 우승을 거머쥐었던 오토 레하겔을 감독으로 영입해 재기를 노리고자 했다. 선수 시절 1963년에서 1965년까지 베를린에서 뛰기도 했던 레하겔이라 본인에게도 약간 의미있는 감독직이라고 한다. 문제는 강등 탈출에 전념을 다해야하는 점이지만. 그러나 시즌 도중에 성적을 올리지 못하고 쫓겨났다.
그리고 34차 마지막 리그 경기. 호펜하임과의 안방경기를 3:1로 이기면서 극적으로 1.FC 쾰른과 1점 차로 16위를 기록하며 2부리그 3위인 포르투나 뒤셀도르프와 잔류&승격 플레이오프 2경기를 5월 11일,16일에 치루게 됐다. 마지막 기회가 남은 셈. 하지만 5월 11일에 베를린 안방에서 열린 1차전에선 뒤셀도르프에게 1:2로 역전패당했다. 그리고 2차전 뒤셀도르프 원정에서 막판 85분 동점골을 넣으며 총력을 다했지만 결국 2:2로 경기를 끝내며 1무 1패로 강등당했다.
3.2. 2012-1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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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하겔의 후임으로 부임한 감독은 요스 뤼휘카이. 2012-13 시즌 2부리그에선 19차전까지 리그 2위를 지키고 있다. 1위인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랑 2점차이며 3위인 카이저슬라우테른과 10점 차까지 벌어졌다. 결국 브라운슈바이크를 2위로 밀어내고 1위로 올라서며 31차전까지 20승 9무 2패로 남은 3경기랑 상관없이 1시즌만에 다시 분데스리가로 승격했다.
3.3. 2013-14 시즌
2013-14 시즌에선 초반부에 상당히 선전을 벌이며 9차전까지 리그 4위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7위까지 승점 차가 겨우 2점 뿐이라 언제라도 뒤집어질지 모른다. 3위인 TSV 바이어 04 레버쿠젠과 승점 차는 7점이며 골득실도 크게 벌어져서 그 이상 추격은 힘든 상황이지만 강등과 승격을 치루고 올라온 팀으로선 엄청난 선전인 셈이다. 물론 그 이후로 순위가 팍 떨어져 23차전까지 리그 7위를 지키고 있다. 그래도 6위 묀헨글라트바흐랑 비슷한 승점차를 유지하고 있기에 유로파리그 진출권 정도를 따낼 수 있는 희망이 있는데 FA컵인 DFB컵에선 32강에서 1.FC 카이저슬라우테른에게 1-3으로 패하며 탈락했기에 리그에 전념해야한다. 그러나 리그에서도 최종순위 11위로 마감하면서 유럽대항전 진출에 실패했다.
3.4. 2014-15 시즌
2014-15 시즌은 고전하다가 9승 8무 17패로 가까스로 15위을 기록하며 잔류에 성공했다. 강등당한 17위 프라이부르크와 승점차는 불과 1점이었기에 그야말로 아슬아슬했다. 그리고 이에 책임을 물어 요스 뤼휘카이감독은 경질되었다. DFB-포칼은 2. 분데스리가의 아르미니아 빌레펠트에게 패해 32강에서 탈락했다.
3.5. 2015-16 시즌
2015-16 시즌, 팔 다르더이감독을 새로 선임했다. 시즌이 시작되자 강등권에서 헤맸던 그 팀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의 돌풍을 일으키며 3위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기세가 사그라져 순위가 하락해 챔피언스리그 진출에는 실패했다. 최종전 결과에 따라 유로파리그 진출은 가능한 상황. 그리고 34라운드 최종전 1.FSV 마인츠05 원정경기에서 0:0으로 비기면서 최종순위 7위로 마감. 유로파리그 3차예선에 진출했다.
3.6. 2016-17 시즌
2016-17 시즌,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뛰던 알렉산더 에스바인 영입을 제외하고 특별한 전력보강 없이 시즌을 치르며 최종순위를 6위로 마감, 또 한 번 유로파리그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는데, 최종승점 49점 중 후반기에 얻은 승점이 고작 19점이라는 점을 감안하자면 전반기에 착실히 쌓은 승점이 팀을 살린 셈.
3.7. 2017-18 시즌
2017-18 시즌은 10승 13무 11패로 리그 10위를 기록하며 시즌을 마쳤다. DFB 포칼은 2라운드에서 FC 쾰른에게 패하며 탈락했다.
3.8. 2018-19 시즌
3.9. 2019-20 시즌
3.10. 2020-21 시즌
- 분데스리가:
- DFB-포칼: 1라운드 VS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
4. 라이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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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테니스 보루시아 베를린과의 더비가 유명했으나 이후 보루시아 베를린이 몰락하며 현재는 보기 힘들다.
- 2019-20시즌부터 성사된 1. FC 우니온 베를린과의 베를린 더비가 가장 유명하다. 과거 분단시절에는 두 클럽 서포터즈들의 사이는 각별했다. 헤르타와 우니온은 한 국가 "Herta und Union – eine Nation"라는 슬로건이 있었을 정도. 헤르타가 동독이나 동구권 국가들 클럽과 경기할때 함께 응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통일이 되며 동베를린 서베를린 1인자 클럽이라는 자존심대결이 되었다.
2019-20시즌 10라운드 역사상 첫 분데스리가에서 치뤄지는 베를린 더비는 47분 관중들이 경기장에 홍염을 쏘며 경기가 중단되기도 했으며 홈, 어웨이 서포터들끼리 서로 상대방 좌석에 홍염을 쏴 부상자도 나왔다. 경기는 1. FC 우니온 베를린의 1대0 승으로 끝났다.
- 전통적으로 FC 샬케 04 울트라스와 사이가 좋지 않다.
5. 응원가
5.1. Nur nach Hause
5.2. Nur nach Hause 독일어 가사
Freunde, was gibt es Schöneres,
Als hier im Stadion unserer Herthamannschaft die Däumchen zu drücken
Und sie von den Rängen zu unterstützen
Auf dem Weg nach oben
Nur nach Hause, nur nach Hause,
Nur nach Hause geh'n wir nicht
Nur nach Hause, nur nach Hause
Nur nach Hause geh'n wir nicht
Nur nach Hause, nur nach Hause,
Nur nach Hause geh'n wir nicht
Nur nach Hause, nur nach Hause,
Nur nach Hause geh'n wir nicht
Alle warten voller Spannung
Auf das absolute Spiel
Denn die Jungens von der Hertha
Haben alle nur ein Ziel:
Heute wollen sie gewinnen
Für das blau-weiße Trikot Sowieso oh-oh oh-oh
Und sowieso oh-oh oh-oh
Nur nach Hause, nur nach Hause
Nur nach Hause geh'n wir nicht
Nur nach Hause, nur nach Hause
Nur nach Hause geh'n wir nicht
Nur nach Hause, nur nach Hause,
Nur nach Hause geh'n wir nicht
Nur nach Hause, nur nach Hause,
Nur nach Hause geh'n wir nicht
All die Fans brüllen sich den Hals aus
Und der Stürmer der stürmt vor
Alle jubeln, wenn der Ball rollt
Voll hinein ins Gegnertor
Und am Abend dann am Tresen
Werden wir zum Libreo
Sowieso oh-oh oh-oh
Und sowieso oh-oh oh-oh
Nur nach Hause, nur nach Hause,
Nur nach Hause geh'n wir nicht
Nur nach Hause, nur nach Hause,
Nur nach Hause geh'n wir nicht
Jetzt seid ihr dran
Nur nach Hause(nur nach Hause),
Nur nach Hause (nur nach Hause),
Nur nach Hause (hey Leute nur nach Hause)
Geh'n wir nicht(genau)
Nur nach Hause(Was soll'n wir denn zu Hause?),
Nur nach Hause (Bei dieser Schwiegermutter?),
Nur nach Hause(Bei diesen hohen Mieten)Also bleiben wir doch im Stadion!)
Geh'n wir nicht
Nur nach Hause, nur nach Hause,
Nur nach Hause geh'n wir nicht
Nur nach Hause, nur nach Hause,
Nur nach Hause geh'n wir nicht
Und nochmal
Nur nach Hause, nur nach Hause,
Nur nach Hause geh'n wir nicht
Nur nach Hause, nur nach Hause,
Nur nach Hause geh'n wir nicht
Denn nur nach Hause geh'n wir nicht
Schwung
오래된 전통을 가진 HA HO HE라는 응원문구도 유명하다. 현재 골송에서도 음악이 끝난뒤
라고 외친다.'''HA HO HE Hertha BSC!'''
'''하 호 헤 헤르타 BSC!'''
6. 레전드
클럽창단 111주년이 되는 2003년에 헤르타 구단은 팬 투표를 통해 "헤르타 BSC 111주년 기념 올스타"를 선정하였다.
7. 선수 명단
8. 둘러보기
[1] 노파[2] 미래는 베를린의 것이란 뜻이다.[3] 2019-20 시즌 시작 전, 125M을 투자하며 37%를 사들였다.[4] 임시이행[5] 분데스리가 출범 이전의 리그로 이 리그에서 우승한뒤 다른 지역 리그에서 우승한 팀과 붙는 방식이었다.[6] 분데스리가 출범 이전의 리그로 이 리그에서 우승한뒤 다른 지역 리그에서 우승한 팀과 붙는 방식이었다.[7] 왼쪽부터 율리안 시버, 불명, 제바스티안 랑캄프, 블라디미르 다리다, 알렉산더 에스바인, 베다드 이비셰비치, 존 브룩스, 마르빈 플라텐하르트, 페테르 페카리크, 미첼 바이저. 위 사진에서 등번호 6번의 블라디미르 다리다, 21번의 마르빈 플라텐하르트, 2번의 페테르 페카리크를 제외하면 모두 팀을 떠났다. [8] 베를린에 연고지를 둔 클럽들을 나열하자면 분데스리가에 헤르타 BSC, 1. FC 우니온 베를린과 4부리그의 베를리너 AK 07, BFC 디나모, FC 빅토리아 1889 베를린 5부리그의 블라우바이스 90 베를린 테니스 보루시아 베를린 헤르타 첼렌도르프 등이 있다. 더 많은 클럽은 독일 아마추어 축구 리그/베를린 문서 참고[9] 당시 분데스리가는 일정 금액 이상 선수 임금을 지급할 수 없도록 규정한 임금상한선 규정이 있었다. 이 규정은 1971년 선수들이 돈을 받고 승부조작에 가담한 사건이 나오면서 폐지된다.